삼양그룹 80년 역사
삼양그룹 80년 역사
  • 김양희 기자
  • 승인 2006.01.01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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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그룹 80년 역사>

*수당 김연수(1986~1978)
수당 김연수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경제근대화에 이르는 정치 사회적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초지일관 ‘기업은 봉사’란 신념으로 올곧게 달려온 선비 기업인이다. 일제 강점기의 한복판에 서 있던 1924년 수당은 삼수사(三水社 삼양의 전신)를 창업, 이 땅의 근대 기업을 개척하는 초석을 놓아 한국의 산업자본 형성을 선도했다.

*창업과 개척(1924~1949)
수당은 1924년 10월 1일 삼수사를 설립, 산업보국으로의 장정에 첫발을 내딛었다. 삼수사는 우리 농촌의 근대화를 목적으로 설립됐으며 이는 연간 1만 8000석의 농토를 근대자본주의적 농업경영으로 개선하기 위한 의지의 집약이었다. 삼수사는 1931년 4월 상호를 삼양사로 변경, 근대적 농업경영, 1936년 간척사업 전격 만주 진출 등으로 의욕적인 경영 활동을 펼치며 우리민족의 경제자립과 농촌 근대화를 동시에 추진했다.

-농장: 우리농촌의 근대화 첫 사업은 소유 토지가 집중돼 있는 장성군에서의 장성농장 개설이었다. 삼수사는 장성농장에 이어 줄포농장 고창농장을 잇달아 개설했다
삼수사는 7년 동안 7개 농장을 조성하며 영농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특히 소작료를 낮추고 소작권을 반영구적으로 보장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영농조건을 실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농가의 생활안정을 위한 배려였지만 결과적으로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만주진출: 1930년대 말 만주에서 전개된 삼양사의 사업은 남만방적의 설립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남만방적의 창립은 국내 기업 사상 최초의 해외공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염전: 삼양사는 1946년 소금제조 허가를 취득해 이듬해 염전 축조 행사에 착수했다.

1948년 말 52.7 정보의 염전 축조 공사를 끝내 천일염 9000가마를 첫 생산 했다. 이후에도 삼양은 염전 축조를 계속해 해리염전은 국내 최대의 민간염전으로 거듭나게 됐다.

*기반구축과 세포석(1950~1974)
해방과 6.25 등 힘든 시기를 극복해낸 삼양은 본격적인 제조업체로서 설탕시장에서의 경쟁우위를 선점하는 한편 다양한 사업분야 진출기반과 성장기반 구축을 위한 새 포석을 다졌다. 1950년대 울산 제당공장 건설, 수산업 진출, 1960년대 전주화섬산업 진출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제당: 삼양사 울산 제당 공장은 매암리 앞 바다 7만 5000평을 메우는 대공사를 통해 마침내 1955년 12월 2162평 규모의 주공장과 부대시설로 완성됐다. 일산 50톤의 정제당 설비가 1956년 1월 3일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함으로써 ‘삼양설탕’의 탄생이 이루어 진 것이다.

-수산: 삼양사는 1961년 서남수산을 삼양사 목포 공장으로 재편해 수산업 가공위주로 바꿨다. 200톤의 제빙시설, 1476톤의 냉장시설을 새로 갖춘 목포공장은 선어와 가공어의 국내 판매 및 수출을 중심으로 영역을 구축했다.

1962년 9월 기름상어의 냉동으로 시작한 여수 공장은 1967년에는 80톤급 삼양 59호를 최초로 자체 건조했으며 이후 현해탄을 넘나들면서 선어, 가공어의 수출에 전력하는 등 우리나라 수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모방, 견방: 삼양사의 섬유산업 진출은 1963년 전주 방직의 인수로 첫 시동을 걸었다.

삼양은 인수와 함께 삼양모방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로써 만주에서 철수한 지 18년 만에 섬유산업에 진출하게 됐다. 삼양모방의 거듭된 고전에도 불구하고 섬유 산업에 애착을 키운 삼양은 업종을 견방업으로 전환, 정상화를 꾀하면서 화섬 분야로의 신규 진출을 강력히 추진했다.

-섬유: 삼양은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공포하던 1966년 화섬공장 건설 계획을 확정하고 10만여평의 부지를 매입해 전주 공장을 건걸하게 됐다. 전주공장은 1969년부터 본공장 건축공사에 들어갔다. 마침내 1969년 12월 스테이플파이버와 필라멘트 방사 여신공정이 가동되고 이듬해 3월에는 종합시설이 준공, 전주공장의 대역사가 시작됐다.

-삼양 50주년 : 삼양에 있어 1970년대 진입은 사업구조가 1차 산업에서 2차 제조 산업으로 완전 전환되는 변신을 보인시기로 집약할 수 있다.

삼양은 창립 50주년이 되는 1974년 새 사옥 건립 계획을 확정하고 지금의 연지동 사업 건립 계획에 나서게 됐다. 또한 같은 해 삼양의 사기와 사가도 제정됐다.
당시 삼양은 울산, 전주, 목포, 여수 등에 사업장을 두고 장차 그룹 경영을 향한 기반을 착실하게 다져갔다.

*사업영역의 안정과 확장(1975~1989)
1975년 삼양은 사업 다각화 고도화를 위해 사업 제편 및 경영진의 세대교체를 단행하고경영의 대전환을 시작한다. 화섬 설비의 증강과 사업 영역의 확대, 제당업의 내실과 시설의 현대화, 기계 산업으로의 진출, 연구개발의 조직화, 전문화를 이 시기에 이룩했다.

1980년대 후반들어 울산 사료 공장의 준공, 음이온교환수지 후처리 공장 준공 등 잇단 신규 업종의 참여와 사업 확장을 전개했다.

-사료: 삼양은 1976년 삼화사료(주)를 인수, 목포 분공장으로 발족시킴으로써 배합사료 산업에 첫발을 내딛게 됐다. 목포 사료공장 현대화로 시작된 사료의 전국 사업화는 1985년 울산공장 1989년 천안공장 가동으로 효율적인 전국 배급망을 구축했다.

-수산: 수산 부문은 1983년 원양어종인 적오징어 가공품을 개발, 수출하면서 내수 중심의 영업을 전개했다. 그 결과 목포, 여수 두 공장의 가동률이 93%에 달하면서 1984년과 1985년에는 쥐치포가 가져온 호황을 능가하는 실적을 올렸다.

-이온교환수지: 이온교환수지는 1970년 대만해도 소요량 전량을 수입에 의존해왔다. 삼양은 국산화 계획을 추진해 1976년 양이온교환수지후처리공장(KI-Plant I) 국산화에 새 장을 열었다.

-화섬: 삼양의 섬유 재료 기술은 사람 머리카락의 4000분의 1밖에 안되는 초극세사에 구멍을 뚫고 원사 단면을 자유 자재로 바꾸는 것은 물론 항균 방취 축열 등 다양한 기능성 섬유를 탄생시켰다. 이렇듯 삼양의 섬유 산업은 30년 동안 한국 섬유 산업 발전에 큰 공헌을 남겼다.

-산업자재: 삼양은 전주공장 화섬 설비 증강과 함께 산업 자재 부문의 설비 신증설도 계속해 모노필라멘트에서 고강력사 스펀본드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삼양중기: 삼양중기는 이천 중기를 인수, 1979년 상호를 삼양중기로 변경하고 기계 주조 제관 부문 등 연간 1만 5000톤 규모의 주물 제품과 기계류 7000톤, 철구조물 2500톤을 생산하는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선일포도당: 선일포도당은 1984년을 기준으로 연간 포도당 2만 1000톤, 일반과당 2만 1000톤, 옥수수전분 1만 8000톤, 변성전분 1만 2000톤, 고구마전분 800톤과 부산물로 옥피와 배아를 생산해 27%의 국내시장 점유율로 업계 수위를 차지했으며 1990년대 성장전략으로 울산에 제 2공장 건설과 인천공장에 대규모 시설 합리화를 추진했다.

-신한제분: 삼양은 식품사업부문의 다각화를 위해 제분업 진출을 검토했으며 1988년 신한제분을 인수, 계열사로 편입하고 충남 아산에 현대적 설비의 제분 공장을 건설해 식품 분야의 다각화에 큰 진전을 이뤘다. 이에 따라 식품사업의 중요한 소재인 전분당, 설탕에 이어 전분을 확보함으로써 식품 사업의 시너지를 높이게 됐다.

-삼양화성: 1989년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분야의 새로운 사업전개를 위해 5대 범용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의 한 분야인 폴리카보네이트수지(PCR)를 생산하는 삼양화성 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삼양화성의 첨단 신소재사업은 삼양이 장차 엔지니어랑 플라스틱 산업을 주력 분야로 육성하는 데 든든한 기반이 됐다.

-삼남석유화학: 삼남석유화학은 1988년 8월 여수시 적량동 여수화학 단지내 3만 4556평 부지에 TPA 생산공장 기공식을 갖고 공장건설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미쓰비시화학과 LG칼텍스 정유 그리고 삼양사가 협력체계를 갖춤으로써 삼남석유화학의 폴리에스테르 제조원료의 안정된 품질과 적기공급을 가할 수 있게 돼 삼양의 폴리에스테르 사업은 경쟁력을 보다강화할 수 있게 됐다.

-삼양데이타시스템: 삼양데이타시스템은 정보 서비스 분야에서 축적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고객에게 최상의 정보기술(IT)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고객이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혁신과 도전(1990~2004)
삼양은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기업변신을 전개, 모든 낭비 요소를 제거하고 기업 체질 강화를 위해 전사적 관리 혁신 운동을 전개한다.

1990년 1단계 혁신 활동을 기반으로 그룹하원의 2단계 관리 혁신을 전개하고 ‘MY BEST 2000´ 운동으로의 확산을 통해 초일류기업 달성을 위한 체질 개선에 전사적 노력을 집중했다. 이 시기는 식품 의약부문의 약진, 연구부문의 도약, 그룹 차원의 사업 고도화 등으로 미래 사업 기반을 구축하며 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다.

-관리혁신: 삼양그룹의 관리혁신은 1989년부터 1990년까지 1단계로 추진하고 이를 기반으로 2단계 혁신운동을 그룹 전 사업장으로 확대했다.

혁신 활동은 크게 세가지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첫째는 사고의 혁신을 통한 의식개혁, 둘째로 낭비요소의 철저한 배재를 통한 생산성 향상, 셋째는 제도의 불합리성을 배제하기 위한 시스템의 선진화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용기: 삼양은 국내 페트병 시장이 형성되던 1986년 전주 공장에 소규모 생산 설비를 갖춰 첫가동을 시작했다. 이후 청량음료 페트병 수요가 팽창 추세를 보이면서 생산설비의 증설을 계획하게 된다. 페트 시장이 활황세를 이어가고 삼양은 1990년 우유탄산음료용 내열 내압병 생산을 위한 설비 도입을 단행한다. 이를 계기로 삼양은 페트병 제품의 다양화가 이뤄지고 1991년에는 탄산음료용 페트병 양산체계를 구축했다.

-재활용: 삼양은 페트원료 및 병 메이커로서 페트로 인한 환경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폐패트병의 재활용으로 자원을 절감한다는 취지에서 재생공장의 설립을 추진해 경기도 시화공단에 연간 1만 2000톤 처리 능력의 시화 공장을 건설했다.

-창립 70주년 행사: 1994년 창립 70주년을 맞이한 삼양은 창립 70주년 기념 사업으로 삼양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역사관, 창조관(대덕연구소 1층) 개관, 세계 석학들을 초청한 창립 70주년 국제 심포지움 개최, 삼양가족큰잔치 한마음 전진대회 등을 갖고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의약: 삼양의 의약 사업이 본격화 된 것은 1994년 삼양사 본사에 의약팀을 신설해 의약 조직을 공식 제편하고 전문 인력을 영입했다. 1996년 12월 국내 최초로 DDS 전문 제약 공장이 준공됐다. 150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된 대덕의약공장은 준공에 앞서 5개월간 의약품제조업허가, 품목허가, KGMP(Korea Good Manufacturing Practice) 지정에 이르는 까다롭고 복잡한 과정을 통과하며 KGMP 적격업소가 됐다.

-그룹연구소: 총 500억원을 투자한 그룹연구소 건립사업이 1993년 8월 1단계 공사를 마치고 대덕 연구단지에서 개소식을 가짐으로써 21세기를 지향한 ‘제 2기 대덕시대’를 활짝 열게 되었다.

대지면적 1만 9000평, 건축면적 7200평 규모로 문을 연 삼양그룹 연구소는 2개 연구동과 9개의 부속건물로 이뤄져있으며 여기에 중앙연구소, 의약연구소, 선일기술연구소(제넥스연구소)가 입주, 2000년대를 향한 ‘기술 삼양의 요람’으로 발돋움 하게 됐다.

-3기경영: 삼양은 경영 체제 및 새인사제도 도입, 성장 사업으로의 재편 등 ‘선택과 집중’을 가속화 해 기업 이미지 변신에 새전기를 일으켰다. 또한 이 시기에 전통과 변화의 균형속에 도약의 의지를 통해 핵심 역량을 발굴, 축척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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