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식품사의 큰 별 故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
한국 식품사의 큰 별 故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
  • 김현옥 기자
  • 승인 2014.07.14 1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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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문제 해결 위해 국가가 할 일 떠맡아
금전보다 영양·건강 우선 원칙
국민 가슴에 기억될 식품 휴머니스트

2014년 7월 10일은 대한민국 식품산업 사에, 그리고 라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날이 될 듯하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삼양식품 전중윤 명예회장이 별세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한국 라면의 대부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 향년 95세의 일기로 10일 오후 8시30분 별세했다’는 부고를 접한 식품관련 업계 및 학계, 정계 등 각계 관계자들은 머리 숙여 애도를 표했다.

6·25 전쟁으로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한 그릇에 5원하던 꿀꿀이죽을 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품사업에 뛰어든 전 회장은 국내 식품산업의 발전을 획기적으로 이끈 가히 기념비적 인물이다.

당시 보험회사 부사장으로 재직했던 그 회사는 그토록 안정된 엘리트 직장도 저버리고, 1961년 삼양식품을 창업해 일본 라면을 국내에 도입하는 역할을 도맡아 1963년 국내 최초로 꿀꿀이죽 두 그릇 값인 10원짜리 삼양라면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국내 라면시장이 연간 2조원을 훌쩍 넘어설 정도로 명실상부한 국민식품으로, 세계 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인의 식품으로 거듭나게 하는 초석이 된 것이다.

당시 서슬 퍼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설득해 공장설비 자금 5만 달러를 끌어낸 것이나, 아직 수교도 되지 않았던 일본의 명성식품을 찾아가 기계와 기술을 전수받은 것이며, 새마을운동으로 잘사는 나라 건설과 식량자급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것 등은 생활이 어려운 서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전 회장의 의지와 기업가로서의 능력을 가늠케 하는 일화이다.

그러나 라면으로 시작해 종합식품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전 회장은 라면으로 인해 큰 시련을 맞는다. 1989년 미국에서 수입한 공업용 우지로 라면을 튀긴다는 이른바 '우지파동'으로 삼양라면은 위기에 부딪친 것이다.

이후 전 회장은 8년여 법정투쟁 끝에 1997년 8월 억울한 누명을 벗고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아 냈지만, 회사의 경쟁력은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전 회장은 회사의 기사회생을 노리며 1990년대 들어서는 기능성·장수식품 개발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외환위기 때인 1998년 부도위기를 맞아 법원에 화의를 신청했고 2005년에서야 화의에서 졸업했다.

2010년 3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전 명예회장은 장남인 전인장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줬다. 하지만 전 회장의 라면에 대한 애착은 매우 강해, 한 번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기존 라면제품에 사용하는 매운 맛 성분 등에 대해 신랄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삼양라면’이 건강․기능성을 갖는 한 끼 식사로서 손색이 없도록 품질 업그레이드를 시도하고 있음을 자랑하기도 했다.

‘인간백회 천세우(人間百懷 千歲憂:인간은 백세를 살지만 천년 뒤까지 생각해야 한다)’를 좌우명으로 “기업은 이익을 내서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고 설파했던 전 명예회장은 자신의 호를 딴 이건식품문화재단을 설립해 해마다 장학금을 수여했고, 강원도 지역주민을 위해 ‘삼양대화의원’을 열어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등 몸소 실천했다. 이 같은 사회공헌사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삼양식품은 오는 14일 오전9시 강원도 원주공장에서 고 전 명예회장의 영결식을 갖고, 강원 평창군 대관령 삼양목장 내 에코그린캠퍼스에 안치됐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계순 여사와 장남 인장, 차남 인성, 딸 혜경·문경·유경·완경·세경씨 등 2남 5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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