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맛 떡] 떡의 역사
[우리 맛 떡] 떡의 역사
  • 식품음료신문
  • 승인 2006.08.0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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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신석기 시대 후기 경에 잡곡농사로 농업을 시작하였다. 초기 농작물은 피, 조, 기장, 수수, 콩, 팥 등이었으며 이후로 적지를 찾아 농업이 확장되고 진전되었다.

우리 조상들은 부족국가를 이루고, 농업을 주산업으로 한 환경에서 공동체적인 모습을 형성하고, 봄, 가을이면 영고, 무천, 동맹과 같은 부락제를 열고 군중이 모여 풍년을 빌고 추수를 감사하며 음식가무(飮食歌舞) 하면서 밤을 지새우는 농경의례를 가졌다.

이러한 농경의례에 의레 술과 떡이 차려졌다. 

떡은 상고시대부터 명절음식, 통과의례음식, 생업의례음식, 무속의례음식, 선물용음식, 제사음식으로 쓰여졌으며 이러한 관습이 오늘까지 계승되어 오고 있는 실정이며 밥을 대용할 수 있는 음식의 성격까지도 가지고 있다.

곡물요리 중에서 죽 다음으로 발달된 것이 떡으로 주식이었다. 그 후 밥이 주식이 되면서부터 의례음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떡은 한자로는 병(餠)이라고 표기한다. 떡은 조리 형태로 정의하면 "곡물의 분식 형태의 음식" 이라고 할 수 있다.

떡은 농경문화의 정착과 그 역사를 함께 하는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음식 중의 하나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떡은 별식이다. "밥 위에 떡"이라는 속담도 있는 것과 같이 밥보다 더 맛있는 별식이 떡이라는 뜻이다.

떡은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각 종류별로 특색이 깊고, 재료의 배합, 향이나 맛의 첨가, 쌀가루에 물 내리기, 설탕물이나 꿀물 섞기 등 만드는 방법도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다. 떡은 특별 음식으로 우대를 받아왔으나 각종 의례의 간소화, 음식의 서구화, 식품공업의 발달로 과자류와 케이크에 밀려 전통 떡이 뒷자리로 물러서고 있는 실정이다.

◈ 상고시대의 떡

떡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밝히기는 어려우나 시루의 등장시기인 청동기시대 또는 초기 철기시대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미 피, 기장, 조, 수수, 콩, 쌀 등의 곡물이 생산되었고, 갈돌, 돌확, 시루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각종 곡물을 갈돌이나 돌확에 갈아 시루에 찐 시루떡이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떡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와 쌀을 중심으로한 곡물이 증산되면서 떡은 크게 발달하였다. 삼국시대 고분에서 시루가 어김없이 출토되고, 고구려 안악 3호분 벽화나 양수리 고분 벽화에 주방의 모습과 함께 시루가 그려져 있는 사실이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왕 원년(298)에는 남해왕(南解王)이 돌아가자 유리(儒理)와 탈해(脫解)가 서로 왕위를 사양했다는 기록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탈해가 유리에게 말하기를 "왕위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바 못되며,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니 시험을 하여 결정하자"고 제의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떡을 깨물어 본 결과, 유리의 치아 수가 많아 유리가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말하는 떡이 어떤 종류의 떡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깨물어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날 정도라면 곡물을 쪄 다시 쳐서 만든 흰떡이나 인절미 및 절편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효소왕대(孝昭王代, 692-702) 죽지랑조에는 "공사(公事)로 갔더니 응당 대접하리라 하고 설병(舌餠)한 합과 술 한병을 가지고..."라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설병"이란 떡이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떡이 구체적으로 어떤 떡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설병(舌餠)의 '설(舌)'자가 '혀'를 의미하므로 혀의 모양처럼 생긴 인절미나 절편을 생각해볼 수 있고, 또 그 음(音)으로 미루어 설병(舌餠) 곧 설기떡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밖에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세시마다 술, 감주, 떡, 밥, 차, 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떡이 제향 음식의 하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우리의 상고시대 음식을 전수해간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정창원문서에는 대두병(大豆餠, 콩시루떡), 소두병(小豆餠, 팥시루떡), 이식, 전병(煎餠) 등의 이름이 보인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치는 떡(인절미, 절편, 흰떡), 찌는 떡(백설기, 콩시루떡, 팥시루떡) 등과 함께 증편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이식, 기름에 지져 만드는 전병 등이 만들어졌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

◈ 고려시대의 떡

고려시대로 오면 권농정책에 따른 양곡의 증산으로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고, 불교의 육성으로 육식이 절제되고, 음다의 풍습이 생기면서 떡은 한층 더 발달하게 되었다.

「해동역사」(권26) 고조에 고려율고의 상세한 조리법이 수록되어 있고, 「지봉유설」(권19)에는 고려에서 상사일(上巳日)이면 청애병(靑艾餠)을 만들어 으뜸가는 음식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쌀가루에 쑥잎을 섞어 찐 쑥설기임을 알 수 있다.

「목은집」에는 유두일에 수단(水團)을 먹는 것에 대하여 "백설같이 흰 살결에 달고 신맛이 섞였더라"고 읊었고, "점서(粘黍)"라는 제목의 시에는

뉘가 알까 떡의 향기를

황금빛이 면(面)에 넘치네

팥소를 넣어서 배가 부르며

먹기 쉬워서 배고픔에 좋다.

소화되기 어려우니 배탈나기 쉽다

고하여 찰기장 전병을 읊고 있다.

또 「고려가요」"쌍화점"에서

"쌍화점에 쌍화사라가고 신딘 회회(回回) 아비 내 손모굴 주여이다" 하였다. 쌍화는 「성호사설」에 기주(起酒)는 밀가루를 발효시켜 부풀게 하여 만든 것으로 상화병(霜花餠) 같은 발효병을 가르킨다고 설명하였다. 이것으로 상화병은 발효시켜 부풀린 떡임을 알 수 있고 원(元)으로부터 도입된 떡이다. 「고려사」열전(列傳) 최승로조(崔承老條)에는 광종(光宗)이 내도장(內道場)의 떡으로 걸인에게 시주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신돈조(辛旽條)에는 돈(旽)이 부녀자에게 떡을 던져 주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떡의 종류도 많아졌고,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조선시대의 떡

조선시대는 초기부터 농서를 간행하여 곡물과 채소재배법에 지침을 주면서 농산물 산출의 증진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멥살, 찹쌀의 품종이 30종에 달하였고, 잡곡은 서(黍, 메기장, 찰기장) 5종, 속(粟, 메조, 차조) 15종, 직(稙, 피) 5종, 당서(唐黍, 수수) 3종, 옥촉서(玉蜀黍, 옥수수), 대맥(大麥, 보리) 4종, 소맥(小麥, 밀), 메밀, 귀리 등이고, 두류는 대두 8종, 소두 7종, 동부, 광장두, 완두, 낙화생 등이 재배되었다.

재료가 풍부해지면서 떡의 종류도 많아지고, 맛이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고려시대의 감설기떡인 시고는 한층 발전하여 부재료인 감가루, 대추 외에 밤, 귤병, 계피가루, 잣, 꿀 등의 재료를 가미시켜 떡의 맛이 너무 맛있어서 차마 삼키기 안타까워서 이름이 석탄병(惜呑餠)이라고까지 붙였다.

주재료가 쌀이나 찹쌀 또는 잡곡 외에 고구마를 이용한 떡도 있었다. 고구마를 껍질째 씻어 말려 가루로 만들어 찹쌀가루에 섞어서 찐 떡으로 남방감저병(南方甘藷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메조가루(黃梁米)에 콩, 대추, 팥을 넣고 버무려서 찐 기단가오라는 이름의 설기떡도 있었다. 또 찹쌀가루에 도토리 가루를 섞어 찐 상실병(橡實餠)도 있었다.

찐떡류는 팥시루떡, 콩시루떡 외에도 무시루떡, 꿀편, 청애 메시루떡, 녹두편, 깨찰편, 적복령병, 싱검초편, 호박편, 두텁떡, 혼돈병, 송피병, 찰시루떡, 잡과병, 산과병 등 20여종의 시루떡이 있었다.

친떡인 인절미도 찹쌀을 쪄서 칠 때 넣는 재료에 따라 쑥인절미, 대추인절미, 당귀잎 인절미 등이 있었고, 찹쌀 외에 기장조 인절미도 있었다.

절편도 쑥절편, 수리취절편, 송기절편, 각색절편 등을 만들었다. 지지는 떡인 전병은 차수수 전병 외에 더덕전병, 토란병, 산약병, 유병, 서여향병, 전전병, 송풍병 등으로 발전하였다.

또 「음식디미방」에 "전화법"이라 기록된 지금의 화전이 있었다.

「수문사설」에 조악전이라하여 백미가루를 설탕물로 반죽하여 설탕소를 넣고 빚어 기름에 지진다고 기록되고, 「규합총서」에는 밤주악, 대추주악이 주재료가 찹쌀가루로 바뀌었다.

삶은 떡인 경단은 「요록」에 경단병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고 찹쌀가루로 떡을 만들어 삶아 익힌 뒤 꿀물에 담궜다가 꺼내어 청향을 바르고 그릇에 담아 다시 그 위에 꿀을 더한다고 하였다.

단자는 「증보산림경제」에 "향애(香艾)단자"라고 처음 기록되었다. 그 후 쑥단자, 밤단자, 대추단자, 싱검초단자, 유자단자, 토란단자, 건시단자, 마단자, 귤병단자, 꿀단자 등이 만들어졌다.

빈대떡이라 불리는 녹두부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같이 다채롭게 발달한 떡은 제례, 빈례, 혼례 등 각종 의례행사는 물론 대, 소 연회에도 필수음식으로 쓰였다.

이같이 발달해온 떡은 서구문화의 도입으로 빵이 유입되자 빵에 밀리기도 하였다. 한편 집에서 떡을 하지 않고 떡 방앗간이 증가하여 떡은 으례히 떡집에 맞추는 풍습이 되었다.

[제공 = 농촌진흥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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