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강릉 선교장과 파이프오르간
[칼럼] 강릉 선교장과 파이프오르간
  • 이철호 명예교수
  • 승인 2023.06.20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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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명예교수(고려대·한국식량안보연구재단 명예이사장)
△이철호 명예교수
△이철호 명예교수

선교장은 경포대 인근의 99칸 고택으로 식품학계나 업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이곳에서 우리나라 전통 음식상을 받아 맛볼 수 있었던 곳이다. 필자는 이곳 종손 중의 한 분인 고려대 이기서 교수와 갑자계 멤버로 교류하면서 선교장의 음식과 음다의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60년 전 대학 시절에는 무전여행으로 관동팔경을 돌아 이곳을 지나면서 오죽헌과 선교장 고택을 본 기억이 아련한 곳이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1692~1781)이 강릉으로 이거하여 현재의 집터에 안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집 앞이 경포호수였으므로 배로 다리를 만들어 호수를 건너다녔다 하여 선교장(船橋莊)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입향 초기에는 안채 주옥을 짓고 기거하였으나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조선의 풍류와 시인, 묵객들이 구름같이 찾아오므로 100여 년 동안 꾸준히 건물을 증축하여 열화당, 별당, 중사랑, 행랑채를 지었으며, 1816년 활래정과 연못을 만들고 연꽃을 심어 현재의 선교장이 완성되었다. 지금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강릉시의 지원으로 잘 관리되고 있다.

6월 초 가족여행으로 오랜만에 이곳을 다시 방문하였다. 안채를 지나 열화당 쪽으로 향하는데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열화당 마당 주변의 중사랑과 행랑채 쪽마루에는 중년 남녀 50여 명이 빼곡히 앉아 열화당에서 연주하는 바흐의 칸타타를 듣고 있었다. 이어서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곡 ‘푸른 도나우강’이 파이프오르간의 풍만한 음색으로 연주되는데 처음 느껴보는 황홀감을 맛보았다.

열화당 뒤편의 소나무 숲 위로 흰 구름이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흐르고 고택의 휘어진 처마는 무희들의 치맛자락처럼 춤추고 있었다. 선들바람에 하늘거리는 마당의 능소화는 왈츠곡에 맞추어 흥겹게 빙글 도는 남녀들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거리의 소극장에서 감상하던 실내악 연주와는 차원이 다른 자연과 역사와 동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진 환상적인 예술이 그곳에 있었다. 앵콜곡으로 영화 미션의 오보에 주제곡, 아름다운 금강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했다.

40대로 보이는 여성 연주자는 잠시 선교장의 역사를 설명하고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이 100여 년 전 금강산으로 유람하던 선비와 풍류객들이 머물던 곳임을 상기시켰다. 선교장은 이들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궁색한 사람들에게는 노자도 보태주었다고 전했다. 이러한 후덕함으로 일제강점기와 6.25 사변의 격랑 속에서도 건물들이 보전된 것이리라. 이날 모인 청중들은 전국 고등학교 교장 연수회 참가자들이었다. 모두 감동적인 분위기에 숙연하면서도 기쁜 표정들이었다. 이곳에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2018년이라고 한다.

선교장 바로 옆에는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이 있다. 김시습(1435~1493)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 ‘금오신화’를 쓴 분으로 불교의 철학과 유교의 이상을 결합하려고 고심한 철학자, 몸과 생명을 중시하는 수련 도교를 실천한 사상가,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동정한 인도주의자,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전통미를 찬미한 여행가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생후 8개월 만에 글을 쓰고 읽었으며 다섯 살에 임금 앞에서 ‘삼각산시’를 지어 5세 동자로 불린 천재였다. 기념관에서는 매월당의 인도주의적 사상과 행적, 방대한 시어와 필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국민소득 3만 불을 넘으면서 우리는 많은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다. 어찌 보면 천박한 졸부들의 부끄러운 모습만이 보이는 시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강릉 선교장과 김시습 기념관은 이 암울한 시대를 극복한 이후의 대한민국의 가능성을 보는 것 같아 희망을 품게 한다. 한민족의 풍류와 철학사상이 서양의 문화를 흡수해 차원 높은 인류문화를 창출하고 선도해 나가는 미래 한국이 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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